1인시위 2년, “엄마가 바뀌면 나라가 바뀐다”

[인터뷰] 오지숙 4·16연대 공감위원회 공동위원장 “떳떳할 수 있을 때까지 뭐라도 하고 싶었다”

권정숙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

시 ‘황무지’의 첫 구절을 떠올리지 않아도,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두해 전 그 봄날의 4월은 우리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다. 진도 팽목항 바다에서 울려퍼진 아이들의 울부짖음은 파도와 대기를 타고 아직도 광화문 광장을 울리고 있다. 이는 거리거리에서 펄럭이는 노란 리본이 전하는 사연 때문만은 아니리라.

가시지 않는 처절한 절규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국가 공권력 개입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음에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오는 16일은 세월호 참사 2년이 되는 날.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기억식’을 한다. 이날 전국민이 한 몸이 된 4·16국민연대가 ‘다시 봄… 기억하라! 행동하라!’ 추모문화제를 광화문 광장에서 열어 진실규명을 재 다짐한다. 하여, 못다 핀 가냘픈 목숨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빗물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런 열망의 기억시간 속에 시 ‘황무지’처럼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 이가 있었다. 서른아홉살의 ‘독수리 오형제’ 엄마 오지숙씨다.

더없이 손이 가야 할 고만고만한 어린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 젊은 엄마가 두해나 거리에서 눈비 맞으며 꿋꿋이 팻말시위를 벌이고 있다. ‘잠든 뿌리’로 살아온 그저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지금은 4·16연대 공감위원회 공동위원장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를 만나러 11일 오전 12시쯤 명동성당 들머리 계단 앞으로 갔다. 혼자 팻말시위를 하겠다 싶어 좀 미안한 맘에 서둘러 다다랐더니 멋지게 생긴 한 남성이 나란히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팻말을 이어받아 오지숙씨한테 좀 쉬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속삭이며) 누구세요? 미국에서 사업차 귀국했다는 김영도(57)씨다. 1인시위가 처음이라는 그는 “페이스북을 보고 감동받아 오지숙씨를 응원하기 위해 왔다. 꼭 점심을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 인터뷰하기 전에 페이스북을 들여다보았는데 같은 맘이 생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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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오지숙씨는 노란 리본 한 움큼을 들고 지나가는 시민에게 나눠주며 외쳐댔다. “2014년 2년이 지났습니다. 가족들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월호 참사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되고 대한민국이 안전한 사회가 될 때까지는 세월호 참사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가족들께 큰 힘이 됩니다.” 그 목소리가 점심때를 맞춰 총총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 페이스북 친구가 많은가 보다. 해외에서도 찾아오고.
페친이 4,700명 정도다. 친구 신청해도 응답을 그때그때 못한다. 팔로잉은 1천명 정도다. 페친들과 소통은 잘 못한다. ‘좋아요’를 눌러주셨던 분이라는 것 정도를 기억하는 정도랄까… 막상 오늘 명동성당 거리에서 만나니 반갑고 기쁘다. 가끔 함께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팻말을 한 개 더 준비해 들고 다닌다.

- 페북 친구로 세월호를 알게 됐나.
4월16일 참사가 며칠 지나지 않은 때 유경근(예은 아버지)님과 페북 친구가 됐다. 그 분이 대변인도 아니던 시절이다. 참사 현장에서 예은이를 아직 찾지 못한 때였는데 그분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페북글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페북 친구를 신청하게 됐다.

- 결정적 1인시위 계기는 언제부터.
페북을 본 뒤 22일쯤인가 예은이 장례식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 옆에 있었던 친구(영만이) 어머니와 얘기하게 되고, 가슴이 너무 아파 뭐라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느냐’고, 자식을 잃고도 체념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엄마… 힘들게 나를 키운 우리 어머니도 생각나고… 고통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어머니의 체념이 느껴졌고 정 안 되면 ‘제가 광화문에서 피켓이라도 들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즉시 4월 28일 월요일부터 1인시위를 광화문에서 시작했다.

- 막내가 세 살이고 아이가 다섯이나 돼서 무척 힘들었을텐데 어떻게 버텼나.
대학생 때에도 시위 한번 안 나가 봤다.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 스물다섯에 결혼해서 다섯 아이 키우고 살림하며 살았다. 애들이 한창 엄마를 찾을 때라 바쁘다. 지금 큰애가 열여섯 살이고 그 밑에 열한 살,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 줄줄이다.

당시 그날그날 페이스북에 광화문 일기를 사진과 함께 올렸다. 그때는 하루 4시간씩 주5일 했다. 막내가 세 살이었는데 마침 어린이집에 다행히 들어갈 수 있어 그나마 가능한 시간이 그 정도가 다였다. 9시30분에 강남 세곡동 집을 나와 광화문에 도착하면 오전 11시였고 오후 3시까지 하다가 집으로 갔다.

그때는 이성적 판단을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덜컥 하겠다 영만 어머니께 말씀드린 후 집에 와선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싶기도 했다. 더욱이 이제까지 촛불집회도 한 번 나가본 적 없는데… 집안일 해야 하는 시간에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온전히 세월호 1인시위를 한 거다.

-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나.
5월말쯤 애들 키우랴, 시위하랴 몸이 못 견뎌 1인시위를 접으려고 팽목항을 찾았다. 그날 비가 엄청 왔다. 새벽에 서울을 떠나 4시간 팻말시위하고 밤늦게 왔다. 그렇게 마지막 에너지를 다 쓰고 나서 한 달 정도 누워서 애를 겨우 보는 정도로 힘들었다. 그 기간에 춘천 등 페북 친구들이 올라와 광화문에서 시위를 이어서 해줬다. 그렇게 좀 쉬었다 합류했다.

6월초까지 매일매일 했다. 처음에는 할 만했는데 한 달이 지나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광화문 도로의 복사열이 30도가 넘어갔다. 화장실을 안 가려고 물도 못 먹고 배가 고팠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참아야 했다. 살 수 있는 아이들이 죽어간 것 생각하면서 참았다. 시간이 갈수록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더니 아침에 못 일어날 정도였다. 애들 밥 차려주고 겨우 치우는 수준이 되고, 남편도 안 좋아했다. 그런데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 내 자식도 아닌데 그렇게 버틸 만큼 절박한 아픔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나.
침몰한 세월호가 270도쯤 기울어서 3부는 바다 속에 있고 반대쪽 창에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어렴풋이 보이는 사진이 한 장 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나도 자식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창문 밖에 생명의 길이 있는데, 나는 저 창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살아서 돌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죽어야 하는데’라는 맘이 전해져왔다. 아이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게…. 광화문을 다니며 치우지 못해 집이 더러워지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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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광화문 엄마들이 ‘리멤버 0416’으로 뭉쳤다고 들었다.
내 페이스북을 보고 1주일에 한 번, 비는 시간 채워가며 계속 연결이 됐다. 후기를 보고 같이 하겠다고 하는 엄마들이 늘었다. 공주에 사는 분도 광화문으로 오고, 그래서 처음에 ‘리멤버 0416’으로 서로 불렀다. 그러다 그해 7월 중순경 유가족 단식천막이 생기면서 같이하다가, 국회로도 가고, 검찰청, 대법원 앞으로 가고 인천 해경으로 가면서 ‘리멤버’가 더 넓어졌다. 서로들 가슴아파했고, 뭔가 하고 싶다고 얘기하다 각각의 포인트에서 1주일 한번씩 돌아가며 할 수 있는 규모가 됐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엄마의 노란손수건’, 아빠 리멤버, ‘바꿈세’ 등 자생모임이 늘어났다고 하는데.
처음에 일인 팻말시위를 시작할 때 페친이 300명 정도 됐다. 친구 신청해주면 친구 맺고 하다가 4,700명까지 늘어났다. 리멤버 0416도 많아졌다. 안산의 ‘엄마의 노란손수건’, 아빠 리멤버, 양평의 ‘바람개비들이꿈꾸는세상(바꿈세)’, 곳곳의 촛불모임 등… 시민들의 자생적 모임들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많이 만들어졌다. 전엔 주로 운동단체가 의식적,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지 싶다. 그러면서 이후 세월호 국민대책회의와 자발적 시민모임이 회의를 했다. 이런 활동을 계기로 지난해 7월부터 4·16연대 공감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게 됐다.

- ‘리멤버’ 엄마모임 활동을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처음엔 파급력이 있을 줄 몰랐다. 8월초에 국회 앞 1인시위 처음 나갔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과 새누리당이 2차 합의를 했다. 유가족과 상의없이 두 당이 정치적 입장만으로 합의를 했다. 그것에 분노해 노란손수건, 리멤버 등 엄마들이 국회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제대로 된 보도는커녕 왜곡 편파보도를 일삼는 방송사를 비롯해, 해양경찰청, 대검찰청, 교육부 앞으로 가 ‘왜 우리 아이들에게 기억하지 못하게 하느냐’는 피켓을 들고 나갔다.

한 곳에 주5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5명은 돼야 한번 돌아간다. 해서 사람을 모아 전국 12개 거점이 생겨났다. 그 즈음에 전국에서 함께 피켓을 들자고 해서 중앙에서 제작을 해 지방으로 보내주었다. 당진, 청주, 진주, 대구, 진천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11월 7일에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특별법 이후가 더 걱정이 됐다. 겨울이니까 동력을 잃을 것 같아 지역에서 홀로 서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기획해 지역을 돌았다.

- ‘유튜브 1인시위’ 네버엔딩 스토리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호응도 컸다는데.
2014년 겨울을 지역을 돌며 열심히 보내고 2015년 2월 어느 날 우연히 ‘네버앤딩 스토리’ 노래를 들었다. “힘겨운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어”라는 노랫말이 자식을 잃은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들렸다. 피켓은 시민들이 지나가면서 보는 것으로 그친다. ‘아직도 저러고 있구나’ 하고 지나가면 끝인 듯해 아쉬움이 들었던 차에 ‘유튜브 1인시위’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었지만 개인이 감당하긴 어려운 제작비는 모금을 했다. 모금 시작 1주일도 안 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참여해 순식간에 2천만원이 넘는 거액이 모였다. 뮤직비디오는 5월께 오픈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현재 15만뷰가 넘었는데, 당시 일주일만에 10만뷰가 넘었다. 그런데 유튜브 오픈 8일째 메르스가 터졌다.(웃음).

- 그간의 활동 속에서 세월호 2주기를 맞는 소감이 남다를텐데.
힘들 때가 더러 있다. 챙겨야 하는 가족도 많고, 남편도 그만했으면 하는 편이다. 얼마 전 영화 ‘귀향’을 봤다. 가해자가 있는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바로 당사자가 진심을 담아 사죄하는 것이다. 그게 안되면 누군가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노태우가 광주 가서 사죄한 것이 아니고 국가가 처벌한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70년 아픔이 지금의 세월호 참사일 수 있다. 내가 침묵하고 아무 것도 안하면 나중까지도 빚진 마음일 것 같다. 리멤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4·16연대에 참여하면서 더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 유가족 분들이 먼저 보낸 아이들을 만나러 가서 떳떳할 수 있을 때까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뭐라도 더하고 싶다.

- 자유언론실천재단이나 언론에 바라는 게 있다면.
안산 분향소에 꼭 한번 가주었으면 하는 여론을 조성해 달라. 그곳엔 304명의 위패가 아직도 있다.

304라는 숫자가 머릿속으로는 잘 그려지지 않는데, 분향소를 가보면 ‘이 사람들이 다 죽은 거야?’ 하는 감정이 한꺼번에 확 다가온다. 왜 이러고 있는지 처음을 돌아봐야 한다.

오는 6월이면 세월호특별법이 끝난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무엇보다 언론에서 보도를 안한다. 팩트TV, 고발뉴스가 생중계하는 정도다. 일반인에게 알려질 통로가 너무 적고 그러니까 힘이 더 안 실린다. 특검, 청문회 중계 등 진실을 알릴 수 있는 길이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다가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같이 아파하고 분노하는 그 힘은 어떻게 계속 지탱할까’를 물었다. 맑게 활짝 웃는 오지숙씨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섯 애들이 달라붙어 안아 달라, 업어 달라고 하면 못 들어주게 되고, 그러면 짜증내게 된다.” 그래서 근력운동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10년 정도 해왔다고 한다. 참 부지런하고 건강하고 예쁜 여성이다.

“엄마가 바뀌면 나라가 바뀐다.”

그에게서 이 말의 무게와 당위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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