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제대로 됐다면?’이라는 물음이 들었죠”

[인터뷰] 박주민 당선자, 세월호 변호사에서 세월호 국회의원으로… “변호사증 꺼내들고 외쳐도 안 됐는데”

이하늬 기자 hanee@mediatoday.co.kr

깨알, 박주민 변호사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다. 박 변호사의 고등학교 동창은 박 변호사의 페이스북에 “아침에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하루에 3번 정도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이였다. 연습장에 무얼 그렇게 적어대는지 ‘깨알’ 같은 글씨로 연습장을 빼곡하게 채웠던 아이였다”고 썼다.

“밥벌이 핑계대지마” 로펌 일도 해야하고 공익 변호도 해야해서 힘들다는 말에 배우자가 이런 대답을 했다며 박 변호사가 웃었다. 그렇게 공익 변론 전담 변호사가 됐다. 동료들과 함께 공익 변호를 맡았고 소속 법무법인에서 ‘활동비’ 같은 월급을 받아 생활했다. 동료들의 도움이 컸다.

“박주민이 거지라는 소문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 기자의 말이다. 박 변호사는 세월호 농성 당시 살이 많이 빠졌다. 정장 비슷한 걸 입었지만 늘 후줄근했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 헝클어진 머리, 구겨진 옷, 까맣게 탄 얼굴. 그무렵 세월호 유가족들은 “저 사람 누구냐”는 말에 ‘우리 법률 대리인’이라고 답하기 시작했다.

55:40.9. 박 변호사의 이번 총선 성적표다. 그는 서울 은평갑 선거구에서 최홍재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그는 “변할 게 무서워서 국회의원을 안 한다? 국회의원이라는 뽕, 한번 맞아보죠”라고 말했다. 14일 오후 은평구 서부병원 사거리에 위치한 선거사무실에서 박 변호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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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민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어차피 보낼거면 박주민을 보내달라”

최홍재 후보는 박 변호사를 두고 “세월호 점령군에게, 은평에 온지 3주밖에 안되는 후보에게 우리의 은평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최 후보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안산도 아닌데 세월호를 전면에 내거는 부담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박 변호사는 더민주가 영입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늦게 공천을 받았다.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박 변호사도 자신이 비례대표를 받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낙선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퇴로를 생각하게 되면 사람이 열심히 하지 않게 된다는 이유다. 지역에서 자리를 닦아왔지만 컷오프 된 온 이미경 의원의 도움도 컸다. 박 변호사에 따르면 이 의원은 당에 “어차피 내려보낼거라면 박주민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박 변호사 ‘지원군’이 몰려들면서 선본은 활기를 띄어갔다. 박 변호사는 “그래서 이길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는 선거 유세를 나가면 ‘인증샷’을 찍어달라는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하루에 찍은 인증샷만 30~40개가 넘는다. 은평에 온 지 한달밖에 안되는 후보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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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탈’ 3인. 선거 이후 뒤늦게 이들이 세월호 유가족이었던 것이 SNS로 알려졌다. 사진=유경근 가족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페이스북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춘 세월호 유가족

박 변호사의 당선을 위해 선본을 찾은 사람은 다양했다. 특히 선거가 끝난 다음에야 알려져 사람들을 마음을 울렸던 건 세월호 유가족의 선거운동이었다. 광화문 농성장 지킴이로 불렸던 영석아빠는 인형탈을 쓰고 춤을 췄다. 경빈엄마도 도라에몽 탈을 썼다. 민간잠수사 김관홍씨는 박 변호사의 선거 유세 차량을 운전했다. 이 사실 역시 뒤늦게 알려졌다.

박 변호사 캠프에서 일했던 최일곤 전 국회 보좌관은 선거 운동이 끝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묵묵히 주어진 일만을 하며 지냈다”며 “박주민은 자신을 위해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추는 영석이 아버지를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고 썼다.

사실 박 변호사가 공식적으로 세월호 변호사로 위임되거나 한 건 아니다. 가족들이 와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일주일 후 직접 청운동사무소 앞에 집회 신고를 하고 촛불집회를 열었고 그러다 먼저 유가족과 함께 하던 변호사가 “나는 팽목항을 담당할테니 너는 안산을 담당하라”고 했다.

잡일부터 시작했다. 회의실을 청소하고 자장면이 배달 돼 오면 식탁에 착착 놓았다. 그러다 2014년 여름이 지나갈 무렵, 유가족들이 박 변호사에게 세월호 특별법 여야 협상 자리에 함께 가달라고 요청했다. 협상 자리에서 새누리당 의원이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죠?” 한 유가족이 답했다. “유가족 법률대리인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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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지난 3월28일 열린 세월호 2차 청문회를 마무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촛불집회 ‘접견왕’이 된 초짜 변호사

세월호 변호사에 앞서 그는 ‘거리의 변호사’였다. 강정마을, 쌍용차, 장진수 주무관, G20 쥐 포스터, 백남기 농민 등 굵직한 일에는 항상 관여했다. 영화배우 고 장자연 소속사 전 대표와 관련해서는 영화배우 김부선씨 변호를 맡았다. 2006년 변호사가 됐는데 박주민이라는 이름은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별명이 ‘접견왕’’이었다.

박 변호사는 “요청이 들어오면 거절을 잘 못한다”며 “공짜 소송이지만 성의있게 임했고 이것 때문에 또 다른 소송이 들어오는, 악순환인지 선순환인지 모를 순환이 생겨버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자세가 구부정하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데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오래 생활한 탓에 허리가 다 망가진 탓이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헌법재판소의 유의미한 판결을 이끌어 낸 유능한 변호사이기도 하다. 2008년 영화 제한상영가 등급제 헌법 불합치, 2009년 야간 옥외집회 금지 헌법 불합치, 2011년 경찰 차벽 전면차단 위헌, 2014년 야간 시위 금지 위헌 등이다. 지난해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가 가능했던 것도 박 변호사 등의 가처분 신청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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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민 변호사가 4월14일 은평갑에서 당선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이하늬 기자

등수 올리는 것이 존재가치였던 대원외고생

원래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대학에 가기 전에는 되고 싶은 직업 자체가 없었다. 성적을 올려야겠다, 등수를 앞당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에 취해서 오직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삶을 살았다. 고등학생이 뭐로 인정받을거냐? 공부밖에 없다. 그게 제 존재가치였다.”

적성, 적당한 성적에 맞춰서 서울대 법대에 갔다. 공부만 했으니 세상물정을 알리가 없었다. “대학에서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 감정이 뭔지 몰랐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해서였다. 신문을 봐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사먹는 법도 몰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해봤다. “친구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는데 대학에서는 친구와 토론도 해보고 벌거벗고 놀아도 보고 시도 써보고 뮤지컬 주연도 해봤다. 물론 뮤지컬 주제는 노동해방이었지만.” 그러다 크리스마스 이브, 철거민들과 함께 구청장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변호사를 생각하게 됐다. 그러면 구청장이 이들의 말을 조금 더 잘 들어줄 것 같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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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은평 서부병원 사거리에 위치한 선거사무실에서 박 변호사를 만났다. 사진=이하늬 기자

“아무리 변호사증을 내밀어도…한계”

인권변호사만 11년째다. “사람들에게 많이 실망도 했고 몸도 지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공익 변론) 때려치워야지 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제가 대리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낸다고 생각한다. 그게 제 욕심이고 즐거움이고 존재가치다.” 다만 그는 ‘한계’는 많이 느꼈다고 했다.

강정마을 4개 소송은 모두 졌고 장진수 주무관과 G20 포스터도 유죄를 받았다. 유가족들과 농성을 할 때도 무력감은 그를 따라다녔다. “경찰에 막혀 있을 때 제가 변호사증을 꺼내들고 아무리 외쳐도 길을 터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이 몸으로 뚫어주었다. 경찰차로 둘러싸는 건 위헌인데 우리는 차 밑으로 기어서 다녀야 했다. ‘정치가 제대로 됐다면?’이라는 물음이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더민주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세월호 다큐멘터리 ‘나쁜나라’를 보면 박 변호사가 세월호 특별법 여야협상을 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을 향해 ‘쌍욕’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제1야당 정도는 돼야 현실적으로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욕 안 먹고 아름답게 살아가려고 운동하거나 정치하는 건 아니다.”

당보다 사람이 먼저 변하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예전에는 서울대 법대 들어가면 애가 변한다고 했다. 한 해에 200명 뽑을 때니까. 그러다 사법고시 붙으면 사람이 변한다고 했다. 국회의원이라는 뽕은 그거보다 세다고 한다. 한 번 맞아보지 뭐. 그게 무서워서 안 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